2009년 08월 04일
아편전쟁 직전 영국 보수당 글래드스턴 의회발언
-3줄요약
중국놈들 좀 병신
우리는 좀 잘났음
병신들 괴롭히지 말자. 나쁜짓임
근데 찬성 271표, 반대 262표로 선전포고
# by | 2009/08/04 21:59 | 역사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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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166권,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6월 1일(신미) 4번째기사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서 현명히 처신할 것을 명하다
전교하였다. |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담론으로써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 |
뭐 이런얘기도 하긴 하지만..정작 사르후 전투의 상황
누르하치는 아민(양남기)과 다르한 히야(정황기)로 하여금 교일기가 감독하는 조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광경을 조선측의 사료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기 속에서 적(후금)의 기병의 대군이 들이닥쳤고, 양 날개로 갈라져서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면서 좌영(左營)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강홍립은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면서 좌영과 함께 진을 펼쳤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적의 기병이 빠르게 돌격을 감행하여,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대포와 총을 한 번은 사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진 안으로 들어왔고 순식간에 좌·우영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좌영의 장수인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는 선전한 뒤 전사하였고, 우영의 장수 순천군수 이일원(李一元), 교일기는 조선군의 중영으로 달아났다. 중영의 5천 명밖에 남지 않게 된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협의한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다. 절망한 교일기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우측 남로군도 소멸되었다.
조선군은 총 1만3천명이었는데, 5천명이 투항
8천이 죽거나 실종됐다는 얘긴데...이건 그냥 부대 궤멸인듯?
정말 밀지 받고 간거 맞나요 이사람
아님 받았는데 대놓고 항복하긴 뭐해서 일단 싸워봤는데 작살?
근데 김응하 같은 경우엔 미친듯이 싸워서 신종황제한테 요동백으로 추봉됐다는데..밀지라서 김응하는 몰랐던건가요
아무튼 역갤에 싸질렀던 글들을 이글루로 옮기는중'ㅅ'
# by | 2009/08/04 21:33 | 역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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